가정
- 박목월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 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 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 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憐憫)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 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시어, 시구 풀이]
* 아니 현관에는 - 시인의 가정에는 : 연쇄적인 부정 어법을 통하 여 현관은커녕 들깐이라고도 할 수 없는 가난한 시인의 집으로 규정함으로써 그의 가난은 숙명적인 것이며, 현실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상황임을 제시하고 있다.
* 들깐 : 경상도 방언으로 부엌 가까이 설치되어 주로 주방 용품 을 보관하는 곳간
●작품의 해제
○지은이 : 박목월(朴木月, 1916-1978) 본명은 박영종(朴泳鍾). 경북 경주 출생.
흔히 ‘청록파’라 불린다. 한국적인 자연과 전통 정서를 노래하여 민요조 율격이 주를 이루며, 향토성 짙은 시를 주로 쓰다가 가족적 유대로 체온을 나누는 시를 썼다. 만년에는 신앙에 깊이 침잠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집으로는 <산도화>, <난(蘭), 기타> 등이 있다.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제재 : 가장(家長)의 삶
○주제 : 아버지로서의 고달픔과 애정 및 연민의 자의식.
○출전 : <경상도의 가랑잎>(1968)
●작품의 감상
박목월의 또다른 시적 경향을 일러 주는 작품이다. 전통적인 한국 고유의 서정과 자연을 간결한 시의 형태로 표현하였던 박목월은 중년 이후 생활 주변의 것들을 노래하는 쪽으로 바뀐다.
이 시에서 냉랭한 현실 속에서 많은 식구들을 감당해야 하는 시인은 삶이 힘겹다고 하지만, 아버지, 가장으로서 자신의 가정을 굳게 지켜 나가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삶이 힘겹고 가파르다고 토로한다. 그러면서 그는 아버지인 가장으로서 그의 자녀들을, 그의 가정을 굳게 지켜 나가겠다고 다짐한다. ‘십구문 반(十九文半)’ 크기의 자기 신발을 거듭 의식하는 것이 그러한 다짐을 보여 준다.
십구 문 반이나 되는 큰 신발이 주는 이미지는 황량하고 허전하며, 생활적이지 못한 화자의 온순한 마음을 표상한다. 이 온순하기 짝이 없는 화자의 생활적 무능은 독자에게 충분한 공감을 준다.
독자에게 연민을 주는 이유 중의 하나는 식솔이 많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표상되는 식구도 그러한 감정을 유발한다. 이 많은 식구가 초라하고 가난하게 살고 있는 가정이란 공간을 설정한 것이 이런 연민을 불러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