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전후의 학교의 모습은 이렇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는 배워야 하는 것이 삶으로부터 괴리가 적은 삶의 일부였고, 그것이 삶에서 다른 계층과의 차별화였으니, 다른 계층이 알지 못하는 것이 배움의 속성이자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학교라는 것은 어쩌면 귀족적이거나 일부 계층에서만 필요했던 것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계층이란 것이 점점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배움이 보편화되고 학교의 모습도 바뀌기 시작했다.
산업혁명, 우리에게는 근대화 혹은 산업화.
배운다는 것은 지식의 습득일뿐이다. 정서, 사회화 같은 것들 역시 학교에서의 중요한 기능이지만, 여전히 학습은 배운다와 동격이다. 그지식의 양은 계층의 사다리로 작용했기 때문에 학교라는 공간은, 단순히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오면서 탁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계층이 변형되고 무너지면서 사회의 모습이 바뀌었지만, 인간은 또다른 계층을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그것을 교육이라는 꽤 괜찮아 보이는 형태로 변형시켰다. 그 지식이 자본의 수단으로 완벽하게 변화하는 어느 시점까지는 유효한 것처럼 보여진다.
우리에게 그 교육의 공고함은 모두가 부정하지 못하는 신성시 되는 것이었다. 전쟁 이후 60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괜찮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언제까지 푸르스름하게 부어오른 환부 속의 고름을 모른 척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더 커지지 않는다면 고름이 있더라도 치료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할 수 있고 외면하는 일이 더 편할 수도 있다.
교육의 주체이자 객체인 학생의 의미 존재에 대해서 언제까지 기존의 답습된 사고대로 대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이것은 자본의 보이지 않는 마술의 손이 어느 정도 만진 결과이다. 그들은 객체의 의미로 대접받아 왔지만, 주체적 능력이 없는 주체로만 남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미 중세의 백성들에게 한글이 주어져 있듯이 손에 스마트한 기기들이 다 주어져 있다. 그것을 지금까지는 가만히 두고 있지만 모를 일이다, 어떻게 그것을 사용할 것인지를, 어떻게 그것들이 학생을 사용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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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자본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게임은 대단히 사회적인 것이고 학교적인 것이다.
성적인 문제나 소비적인 게임은 그런 면에서 또한 학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통제의 수단, 브이 포 벤디타, 가면을 써야 하고 가면 뒤에서 정의로운 듯한 모습을 하고 정상적인 것들을 가장하고, 그렇게 믿게 만드는 것이 가장 위대한 권력이다. 자본은 나쁘지 얺다, 라고 따듯한 자본이 말하는 교육을 우리는 받아 왔고 시키고 있다.
우리 사회는 두 가지 모두를 내밀고 있다. 약과 약. 아플 수 있는 약과 아프면 먹는 약.
이전에는 아픔을 조금씩 치유할 수 있는 약을 내밀었다면, 이제는 그 속도가 빠르고 그 방법도 달라졌다. 학교는 그것중에 하나.
안 아프다고?
그럼 약을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