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고 괜찮은 날인데, 불쑥 살면서 이런 날이 얼마나 될까 싶어진다. 바람도 시원하고 지금은 날도 적당히 어두워진다. 부족한 것들이 모두 채워지거나 숨겨 지는 시간이다. 어디서든 혼자 있는 이런 시간이 드물어 그나마, 이 시간이 귀하다는 생각이, 조금 위로가 된다. 아니 별로다.
의미를 전달하기에는 터무니 없이 믿을 수 없는 - 특히 감정을 전달하기에는 오해가 많은 활자를 남기려고 홈페이지를 열었다. 하지만 이 활자들을 내가 남기는 것처럼 나 역시 여기 사무실에 잠깐 남겨졌고, 지구에도 아주 잠깐 남겨질 것이다.
요즘 제일 열심히 하는 일이 정리하는 일이다. 마음은, 솜털같이 가벼운 마음은 어쩌질 못하고 옷장을 비우고 안 쓰는 물건들을 정리하고 - 정말 고민없이 버리고있는 중이다 - 사물함을 절반 가까이 비우고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정리하려고 애를 쓴다. 지금은 절반 정도 그런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 절반 중의 절반을 버리고 싶다. 무엇이든지, 마음도 - 적어도 느낌만이라도, 줄어들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해볼 참이다. 담배를 끊고 배가 나오고 봄에 이 우울이 끊이지 않고 떨어지는 꽃잎보다 더 깊은 마음이어도 괜찮다, 괜찮다. 아니 별로다.
내 삶에 대한 예상과 대상에 대한 기대를 줄이고 비워야 하는데, 청소와 정리만 열심히 하는 중이다. 어느날부터 시나브로 나는 이렇게 작아진 것인지 아니면 최근에 어떤 일로 - 이를테면 잠자는 중에 외계인의 습격을 받아서 - 물론 난 이걸 인지하지는 못하고 - 그렇게 된 것인지는 스스로 판단이 어렵다. 아니면 근원부터 작았을 수도 있다. 그 과정이야 어떻든지 과거를 돌이켜보면 반반이었던 듯 싶기도 하다.
삶이 힘들다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 없이 언짢아하고 짜증내며 무언가를 요구하기만 한다. 현재의 내가 그렇다. 지금만이라고 그래서 감정이 요동을 치는 시기라고 생각하며 조금이나마 위로를 더해본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만들어야지 지금같아서는 너무 흔들려 어지럽다. 곁에 이런 푸념을 들어줄 사람은 없다. 다 힘든데 혼자 힘드냐고 그런 사람인줄 몰랐다고 자기와는 생각이 다르다고 왜 일을 하지 않느냐고 알아서 좀 하라고 그래도 잘하고 있지 않냐고 원래 말을 함부로 하냐고 말한다. 다들 애정이 있어서 그런다. 알고 있다. 애정이 가득한 이런 말들 외에는 거의 다른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을 것이라고 굳은 믿음을 가져 본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으니까.
이제 돌아가야겠다. 세네카의 책과 올리버 색스의 책을 샀다. 읽어야겠다. 왜 이 책들을 골랐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예스24를 기웃거리다가 이 책을 샀다. 기웃거리는 사람이니까.
사물함을 정리하다가 지금까지 버리지 않고 놔둔 몇 개의 사진을 발견했다. 버렸어야 했는데, 오늘도 버리지 않았다. 이미 죽음을 선택한 아이의 사진이었는데, 사물함 앞에서 한참을 글썽이며 그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했다. 이런 일도 잠깐 있었다. 다음 사물함 정리할 때는 꼭 버리고야 말겠다.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30년이 되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다. 기억한다. 난 니들과 달라, 라는 마음으로 팝을 열심히 들었었다. 친구놈들과 헐리우드 키드, 빌보드 키드로 나뉘어 열심히 듣고 보고 외웠었다. 그 친구들은 아무도 곁에 없다. 지금 여길 나서기 전에 라디오를 듣고 있다. 청소를 하고 정리를 하고 그래도 홀가분함이 조금도 들지 않아 혼자 잘 삭이고 있는 중이다. 나는 젓갈이다. 자가 격리는 나도 잘할 자신이 있는데, 그런 기회가 오지 않는다. 세상에, 책상 위에 있는 컵을 살짝 밀었더니 모래 긁히는 소리가 난다. 모래는 언제 책상 위까지 올라 왔을까.
모두가 침묵했으면 좋겠다. 입닫힌자들의 도시, 두 시. 뭐, 이런.... 그늘 밑에 서 있던 그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같이 안녕히 계세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서정주의 이 시처럼 안녕히 계세요. 주말 잘 보내봤자지만 잘 보내시구요.
아, 글을 쓰고 싶다.
그리고 누군가를 잘 위로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