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24 12:31

권 모 씨에 대해

조회 수 9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군에서 만난 권 모 씨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는 강원도 출신이었고 그 지역 대학의 국문과를 다니다가 군에 왔다. 전형적인 팔자 걸음이었고 강원도 사투리를 진하게 구사했으며 얼굴은 까많고 둥글 넙적한 편이었는데, 눈이 시원하게 컸다. 머리카락은 짧은 곱슬이었고 자주 웃었다.

자대 배치를 받은 나에게 그는 대단히 큰 사람이었다. 저 멀리 있던 고참들과 이제 막 신병이었던 무리들의 중간이었으며, 고참들의 온갖 갈굼(욕설과 구타)을 다 받아주고 우리에게는 잘 좀 하자, 라는 말과 함께 뒷모습을 보이며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을 넘어가곤 했다. 그런 일들은 거의 일년이나 반복되었다.

그러다 한참 뒤, 그러니까 그가 내무반에서 조금 높은 자리에 올랐을 때, 이러다가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가 끝내 못 가지, 라는 가사를 웅얼거렸다. 내무반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계급에 올랐었다는 기억이다. 

그 노래는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었다. 고졸이었던 나는 철학과 문학 언저리에서 그 세계를 동경하며 많은 책들을 읽었던 터라 그와 얘기가 통했다. 니 먼지 아나? 라는 강원도 사투리가 생생하다. 그리고 반복된 그의 노래에 나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긴 한숨 대신 그 가사를 읊조렸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면.


가끔 그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 노래가 떠오른다.


최근 검색 사이트에 그의 이름을 넣어 보았다.

전역 후 나는 대학을 가기 위해, 그리고 생계를 위해 지금은 다른 대학으로 통합된 철도대학에 응시한 적이 있었고 면접을 위해 의왕이라는 낯선 곳을 찾아가 어색하기 그지 없는 면접 대기실에 앉아 있다가 전역 후 그곳에서 그를 다시 만났었다. 반갑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던 그 순간이 지금은 사실이었는지조차 가물거린다. 놀라운 일이었다.

밥이라도 한끼 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한 것이 아쉽다.

그는 분명 그곳에 합격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관사가 되었을까 싶어 그의 이름을 검색했지만, 결과를 얻을 수는 없었다. 철도기관사는 그와 잘 어울리는 직업이다. 혹 철길 위에서 지금도 그 노래를 부를까. 지금은 전혀 다른 상황이겠지만 꼭 그러고 있을 것만 같다. 내가 가끔 그러듯이. 


오늘의 생각 하나

오늘을 시작하며 혹은 마치며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02 러브레터 어떤글 2021.12.31 100
401 글을 놓다 어떤글 2021.12.13 109
400 나에게로의 답장 어떤글 2021.11.10 95
399 외로움의 부피를 가늠하기 어떤글 2021.10.25 93
398 질병 어떤글 2021.09.29 86
» 권 모 씨에 대해 어떤글 2021.09.24 90
396 바다 끝 어떤글 2021.09.16 78
395 자기소개서 어떤글 2021.09.14 73
394 꿈 이야기 어떤글 2021.09.13 72
393 경박단소 어떤글 2021.07.16 96
392 아주 긴 글 어떤글 2021.06.15 135
391 비, 무력감 어떤글 2021.06.03 97
390 청소부 이야기 어떤글 2021.05.26 74
389 오늘의 한 줄 어떤글 2021.04.21 76
388 헛소리 어떤글 2021.04.13 91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29 Next
/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