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방식을 말하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는 대부분 주변의 자연 환경이나 사회 환경, 그리고 가정 환경이 그 사람을 지배한다. 하지만 그렇게 성격이나 인성, 지적능력이 갖춰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의 대부분을, 이것들을 포함해서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는 편이다. 운명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그 이후에는 선택에 의해 많은 것들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살아가면서 어느 정도의 심리적 독립을 이루는 나이가 15살부터라고 하면, 경제적인 독립은 사실 그 만큼이 더 필요하다. 심리적인 독립을 찾아가는 동안, 삶의 방식데 대한 고민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면, 이미 유년기를 거치면서 삶의 방식 또한 거의 결정 지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이후에 결정되는 몇 가지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일일 수도 있다.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
흔한 고민 앞에서 -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고민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경우까지도 고민의 범주에 포함시킨다면, 고민 앞에서 우리가 결정하는 것은 어떤 삶의 방식을 결정하느냐 보다는 어떤 행동의 결과를 선택하느냐는 문제일 것이다. 어린 시절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소유(이름)을 말하면서부터 이 고민은 시작된다. 사실 언어의 습득 과정에서 이런 많은 고민들은 우리를 가로막는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이나 미래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 스무 살이 되면서부터는 계획과 무질서가 혼재해서 어느 순간에는 계획적인 노력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모든 것이 무의미해 보여서 아주 빠르게 우리 곁을, 그 스무 살이라는 나이가 지나가 버린다. 그러고는 20대의 어느 중반에 어느 일을 하게 되고 어느 일은 하지 못하게 되고, 어떤 일을 하려고 하지만 그 일을 못하고 다른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아지게 된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 중에서 하나를 선태할 수 있을 뿐이다. 대부분 자신의 의지와 선택과는 무관하게 어떤 일이라는 것이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경제적인 크기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삶의 틀이 점점 견고해지기 시작한다. 이것은 접착제처럼 빠르게 굳지 않고 아주 서서히 마르지만 어느 접착제보다 더욱 견고하게 자신의 움직임과 사고의 범위를 결정하고 만다. 만일 이 일을 거부하거나 그런 견고함을 깨트리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거나 자신의 시야를 벗어나서 전혀 새로운 것을 선택해야 한다. 나이로 말하자면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인데, 지금 우리사회에서는 점점 이런 경우가 많아지고 나이는 뒤로 물러서고 있다.
그런 뒤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오로지 곁눈질로만 쳐다보고 발끝만을 보고 자신이 볼 수 있는 시야만큼만 상상하게 된다. 한번도 그 방식을 벗어나려고 시도하거나 다른 세상과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서는 눈을 돌리지 않는다. 직장에서의 이야기, 자신의 푸념,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문제, 그리고 자신의 고민들, 자신의 잘못된 과거들에 대해서만 이야기 한다. 지겹도록 똑같은 말들을 하면서도 그리고 희미해지는 꿈에 대해서 가끔 이야기하면서도 그 생각들을 아주 빨리 휘발시키고 만다.
삶의 방식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의 주어진 환경과 관계들이 모두 결정하지만, 그 이상의 선택과 상상은 자신의 몫이었으니, 언제든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지금 새로운 꿈을 꾸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새로운 사고와 삶의 방식을 선택해도 아무 잘못도 없을 것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 안에서 아니다. 이것은 분명해야 한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 안에서 새로운 것은 없다. 정말 새로운 것은 새로운 것이다. 자신과의 관계 안에 있는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벗어난 것이다.
농사 짓는 농부가 새로운 마을로 이사를 하거나 새로운 노동을 하거나 새로운 작물을 하거나 새로운 기계를 사거나 새로운 품종으로 바꾸거나 새로운 밭을 사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새로울 수가 없다. 농사 짓는 농부였다면 대학 강사가 되거나 엔지니어가 되거나 작가가 되거나 요리사가 되거나 금융분석가가 되거나 해야 하는 것이다. 농사를 지으면서 할 수 있다면 틀을 유지하면서 찾은 것이고 농사를 버렸다면 삶의 방식을 바꾼 것이다.
결국 삶의 방식은 여전히 어렸을 때, 자신이 자신에게 처음으로 했던 거짓말과 같다. 새로운 사고의 시작과 선택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그 첫 거짓말을 했을 때, 거짓말 이전과 이후의 시간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처럼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한다면, 지금의 모든 것들과는 자신과 환경이 달라지는 것이다. 실제적인 변화가 아니라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에 대한 변화를 말한다. 돈이 벌어서 쓰고 다시 벌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돈을 모아서 다시 그 돈이 돈을 벌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더이상 돈은 벌어서 쓰고 저축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서 여전히 고민 중이지만, 꼭 바꿔나가고 싶다. 사실 바꿀 만한 고집스런 나만의 삶의 방식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바꿀 것이 아니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고민스럽다. 그래도 조금씩 에너지가 축적되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