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06 18:54

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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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수많은 일들이 우연하게 일치되어 일어난 경우였다. 몇 십 년만에 찾아온다는 혜성이나 특별하다는 일식 같은 그런 엄청난 사건은 아니었지만.
 
코로나19로 방역팀이 사무실을 방문했고 거기서 쫓겨나듯 나온 나는 갈 곳이 한 군데밖에 없었다. 그랬었다. 그래서 30도에 육박하는 날씨에 커피 한 잔을 머신에서 만들어 건물 맨 뒷길로 올랐다. 몇몇의 사람들을 만나면 인사도 건네고, 일부러 웃어주기도 하였다. 봄볕은 뜨거웠지만 지나는 바람은 서있는 나무를 설레게 만들었다. 정말 그렇게 보였다.
아는 형님 이야기를 하며, 그 형님 땅에 토마토 몇 주 심었다며 시누대를 지주대로 쓰려는 누군가를 뒷길에서 만나 도와주었고, 텃밭의 상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툴어지게 올라온 적상추를 바라보고 있자, 상추가 나에게 얼굴을 보였다. 뜨거울수록 더 잘 자라는 식물들의 자세에 대해 생각했다.
베어진 히말라야시다들이 그래도 몇 그루 살아남아 있고, 큰 단풍나무가 있으며, 그 길을 지나면 다시 삼나무도 얼마쯤 서있다. 딱 나무들을 지나치며 그만큼 걸었을 때였다. 50미터 길이 정도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 시간에 동시에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다.
애플 뮤직에서는 어떤 노래들이 무작위로 나오고 있었고 비탈길을 막 내려서고 있었을 때였다. 귀에 걸쳐진 헤드셋에서 "게드 전기"의 노래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좋아요를 누른 적도 없고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한 적도 없으니.
 
무반주의 "테시마 아오이"의 노래가 막 시작되었고 미루나무 꽃가루가 어지럽게 날고 있었으며, 바람은 수많은 잎들을 팔랑거리며 뒤집고 있었다. 실제로 그 애니메이션에 나오지는 않지만 토토로의 어딘가에 있을 법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장면 그대로였다. 그 공기는 아카시아 향으로 가득했다. 어쩌면 아카시아 향기에 공기가 섞여 있었다고 해야 되겠다.
언젠가 누군가가 벚꽃길 밑에서 일본인들에게는 벚꽃 필 때 죽는 환상이 내재되어 있다고 했었다. 아무 근거도 없이 비논리적인 그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카시아 향은 깊어서 내가 향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향 속에 점점 작아지는 내가 사라져 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테루의 노래"가 끝날 때까지 한동안 서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인 것만 같았고, 삶이 끝날 때도 이런 날이었으면 싶었다. 그런 욕심이 그 순간에도 생겨나는 것이 이상했다. 그 모든 느낌들은 차갑지도 따듯하지도 않은, 감정이 삭제된, 하지만 밝은 것만은 분명해 보이는, 가보지 못한 죽음의 문턱, 그대로라고 여겨졌었다. 
건물 속으로 들어가서도, 언제 그 자리에 다시 서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든, 나는 언젠가 오늘 그 시간을 떠올릴 것이다. 그럴 것이라고 믿으며 바로 내려오지 못하고 텅빈 건물 복도에서 창문을 열어두고 반짝이는 아카시아 잎을 올려다 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다시 서 있게 되었다. 
시간의 속성이 그렇지만, 모든 분절된 시간이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다. 혹 기억에서는 사라진다고 해도, 그것은 내 생에 다시 없을 시간이었다. 다만 어느 세포에나 조금이라도 남아 있기를 바랄 뿐이다.
바람이 반짝반짝 닦아 둔 잎파리며, 햇살이 그 틈을 파고 들어 내리는 장면이며, 그 게드 전기 주제 음악이며 하는 것들은 내가 커피를 들고 혼자 뒷길에 올라 시누대를 꺾고 그 시간에 상추를 들여다 보고, 몇 걸음, 몇 초, 그래서 그렇게 해서야 그 시간에 거기서 모두를 만날 수 있었던 것들이다. 지금 순간도 사실 우연이 일치되는 수많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만난 것에 대해 감사하다.
이 말이, 태어난 것들에 대한 가장 큰 헌사일 것이다.
 
이 감정이 희석될까봐 건물 입구에서의 누군가의 부름에도 들어와 앉아 그냥 이 글을 쓴다.
아직도 내 귀에는 이 글을 쓰고 고치는 내내 테시마 아오이의 울림이 들리고 있다. 슬픔과 나른함의 어느 중간에 끼어 있다. 
 
2020년 어린이날 바로 다음 날 수요일, 오후 두 시 넘어서고 있었다. 기온은 29도였다. 
나 혼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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