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래빗 홀 Rabbit Hole, 2010
2010
감독 존 카메론 미첼
출연 니콜 키드먼, 아론 에크하트
등급 15세
평온한 삶을 살아가던 어느 가정에 불행한 일이 일어난다. 개를 쫓아가던 어린 아들이 차에 치여 죽음을 맞이하고, 부부는 그 아이의 죽음에 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극복해 나가고자 몸부림을 친다.
평온함이란 어떻게 보면 행복이란 말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지만, 평온함이 반드시 행복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불행은 혼자서 오지 않는다. 불행의 사건은 또다시 다른 불행을 달고 나타난다. 평온한, 혹은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 가정이었다면, 또다시 찾아온 불행을 어떻게 대했을까. 그 불행을 불행으로 받아들이고 역시 불행으로 대처했을 가능성이 짙다. 하지만 불행의 루틴에서 그 고통은 어느 정도 작아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영화를 통해 아이의 죽음을 극복하는 방식보다는, 서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삶을 선택하는 방식에 관한 문제에 집착하고 싶다.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을 각자 선택하면서 아이의 고통에 더해서 삶을 살아가는 또다른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부부는 문제의 근원에 대해서는 공감하면서도 그 방식에서만큼은 서로에게 의지가 되지 못하고 조금씩 틈을 보이기 시작한다. 결국에는 그 틈들이 봉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번 틈이 생기면 그 흔적이 남게 마련이고 다시 그 틈이 벌어질 개연성이 크다.
다른 하나. 영화 제목을 래빗홀로 설정한 것을 주목해 보고 싶다.
시에서의 제목은 핵심 제재인 경우가 많고 소설에서의 제목은 주제의식인 경우가 많다. 서사로 따진다면 영화는 당연 소설에 가깝다. 하지만 상징적인 제목의 배치는 조금은 시적이고 가볍기까지 하다.
자신의 아들을 죽게 만든 소년과의 교감은 수많은 차원이 존재한다는 설정의 래빗홀로 어쩌면 자신이 느끼는 고통과 아픔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다른 차원의 자신이거나 자신의 아들에게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것은 조금은 단순한 접근이다. 역설적이게도 자신에게 고통을 준 근원에 접근하여 그 근원을 다른 방식으로 긍정하게 되면서 고통의 테두리에 서게 한다는 것이다.
예쁜 조디 포스터는 이제 이성적이고 차가운 이미지의 여배우로 남게 되었다. 감독이 원하는 바가 그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영화는 끔찍한 소재만큼 슬프지는 않다. 다만 중간중간 배치되어 있는 삶의 작은 실제적인 조각들이 현실에서 우리가 겪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거나,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크게 만들어 주는 것에서는 아주 흡족하다. 특히 지하 세탁실(?) 공간에서 이미 자식의 죽음을 경험한 여주인공의 어머니와 여주인공의 대화는 상투적이지만, 깊이 있게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집중력을 부여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