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을 차고
-김영랑
내 가슴에 독(毒)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害)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어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億萬世代)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虛無)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문장 10호, 1939.11)
* 작가 : 김영랑(1903-1950)
본명은 윤식(允植). 전남 강진 출생.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에서 수학. 『시문학』으로 등단. 『시문학』 동인.
그는 목적의식을 배제하고 유미적이며 이상적인 순수시를 썼다. 그의 시는 잘 다듬어진 언어를 재료로 정교한 율조를 이루며, 이를 통해 인간 내면의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하였다.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설움받은 민족의 희망을, 봄을 기다리는 작자의 마음에 의탁하여 읊은 격조 높은 서정시이다. 시집으로는 『영랑시집』이 있다.
● 작품의 해제
○성격 : 의지적, 직서적, 저항적, 상징적, 우 의적
○어조 : 결연한 남성적 어조
○표현 : 주정적 정감의 직서적 표출
○특징 :
①상징에 의한 심상
②두 삶의 자세의 대조
○구성 : 화자의 이동에 따른 구성
① 벗과의 대화(1연)
② 벗의 충고(2연)
③ 독(毒)을 찬 배경(3연)
④ 나의 결의(4연)
○제재 : 독(毒)
○주제 : 순결한 삶의 의지.
●작품의 감상
현실 세계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표(言表)하기를 그토록 꺼려 왔던 영랑으로서도 참을 수 없게 만든 일제 말기의 발악적인 분위기가 어떤 것이었던가를 짐작케 해 주는 작품이다.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깨닫고 화자는 마음에 ‘독(毒)’을 품는다. 물정 모르는 사람처럼 마음의 평화를 갈구해 오던 영랑이기에 그의 속 어디에 이런 독기가 숨어 있었나 싶게 충격을 준다.
‘벗’은 ‘땅떵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이 허무한 세상에서 ‘머지 않아 너 나마저 가 버리면’ 그만인데 독을 차고 살아서 무엇하느냐고 충고를 한다. 그러나 ‘나’는 나를 노리는 식민지 현실 속에서 태어난 사실마저 저주하며 ‘선선히 독을 차고 가리라’고 다짐한다.
이 원망스러운 세상에서 단지 육신의 안일만을 추구하며 산다는 일이, 맑고 평화로운 ‘마음’의 세계를 지향해 온 영랑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그래서 현실 순응주의를 버리고 그는 끝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현실에 맞서 저항할 것을 결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