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덤불
‘태양(太陽)’을 의논(議論)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太陽)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城)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太陽)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 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 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 여섯 해가 지내갔다.
다시 우러러 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噴水)처럼 쏟아지는 태양(太陽)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보리라.
●작품의 해제
○성격 : 상징적, 서술적, 독백적, 이지적
○어조 : 비판적, 관조적 어조
○특징 : 반복법의 사용으로 표현 효과 증대
○소제 : 꽃덤불
○주제 : 광복의 기쁨과 새로운 민족 국가 수립의 염원
●작품의 감상
꽃덤불에는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가 나온다. ‘밤’의 어두운 상황이 그로 하여금 ‘태양’을 그리워하게 한다면,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난 후에는 태양을 이야기하는 것이 새삼스러울 터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 단순치가 않다. 이 시의 후반부에는 ‘드디어 서른 해가 지나갔다.’는 시구 다음에 이런 구절을 놓고 있다.
“다시 우러러 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이것은 우리 나라가 주체적인 역량에 의해서라기보다 연합군 세력에 의해 해방됨으로 해서 빚어지는 새로운 모순을 암시해 준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상황 인식은 매우 정확한 것이다. 8·15 해방은 글자 그대로 해방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 식민주의는 새로운 식민주의의 발판을 마련해 놓고 물러간 것이다. 어찌 보면 식민지의 연장이기도 한 당시의 현실이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러한 상황을 그가 염려하는 이유는 일제 치하에서처럼 영영 잃어버리는 벗이 생길까 해서이다.
이 시의 가장 충격적인 슬픔은,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 시는 비슷한 상황이 계속되는 한 그러한 비극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염려가 ‘꽃덤불’에 안기리라는 희망을 앞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