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의미가) 되고 싶다.
(현대문학 9호, 1955.9)
●작품의 해제
○성격 : 관념적, 주지적, 상징적, 인식론적
○어조 : 갈망적 어조
○특징 : 명명(命名) 행위에 의한 인식을 바 탕으로 함.
○표현 : 의미의 점층적 확대(단계적인 의미 의 심화 과정을 보임)
○제재 : 꽃
○주제 : 존재의 본질 구현에 대한 소망
●작품의 감상
존재 탐구의 시인 김춘수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 이 시는 서정성이 일체 배제된 관념적이고 주지적인 작품이다.
처음엔 무의미의 관계였던 ‘나’와 ‘그(너)’가 ‘이름을 불러 주는’ 상호 인식의 과정을 통해, 서로는 서로에게 ‘꽃’이라는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로 변모하게 되고, 마침내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 있는 존재인 ‘꽃’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명명(命名)’ 행위는 사물의 본질을 포착하고, 그것을 실재적인 형상으로 표현해 내는 작업을 뜻하게 된다.
이것은 언어를 ‘존재의 집’으로 파악한 하이데거의 명제와 비슷한 시적 발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존재를 조명하고 그 정체를 밝히려는 이 시는 주체와 객체[대상]가 주종(主從) 관계가 아닌, 상호 주체적 ‘만남’의 관계로 형성되어 있다. 모든 존재는 익명(匿名)의 상태에서는 고독하고 불안하다. 그러므로 이름이 불려지지 않은 상태[존재를 인식하기 전]에서는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에게서나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명명(命名)이라는 과정이 있기 전까지는 참다운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부재(不在)의 존재였던 ‘꽃’이 이름을 불러 주는 나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존재의 양태를 지니게 되며, 반대로 내 존재도 누가 나의 이름을 명명할 때야만, 부재와 허무에서 벗어나 그에게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