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03 14:56

기형도의 식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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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목제

                기형도 


어느 날 불현듯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

물끄러미 팔을 뻗어 너를 가늠할 때

너는 어느 시간의 흙 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

축축한 안개 속에서 어둠은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 올린다

낯선 사람들, 괭이 소리 삽 소리

단단히 묻어두고 떠난 벌판

어디쯤일까 내가 연기처럼 더듬더듬 피어올랐던

이제는 침묵의 목책(木柵) 속에 갇힌 먼 땅

다시 돌아갈 수 없으리, 흘러간다

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 두는 법 없이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자리를 바꾸던 늙은 구름의 말을 배우며

나는 없어질 듯 없어질 듯 생(生) 속에 섞여 들었네

이따금 나만을 향해 다가오는 고통이 즐거웠지만

슬픔 또한 정말 경미(輕微)한 것이었다

한때의 헛된 집착으로도 솟는 맑은 눈물을 다스리며

아, 어느 개인 날 낯선 동네에 작은 꽃들이 피면 축복하며 지나가고

어느 궂은 날은 죽은 꽃 위에 잠시 머물다 흘러갔으므로

나는 일찍이 어느 곳에 나를 묻어 두고

이다지 어지러운 이파리로만 날고 있는가

돌아보면 힘없는 추억들만을

이곳저곳 숨죽여 세워 두었네

흘러간다, 모든 마지막 문들은 벌판을 향해 열리는데

아, 가랑잎 한 장 뒤집히는 소리에도

세상은 저리 쉽게 떠내려간다

보느냐, 마주보이는 시간은 미루나무 무수히 곧게 서 있듯

멀수록 무서운 얼굴들이다, 그러나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 어디 있느냐

식목제(植木祭)의 캄캄한 밤이여,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입상(立像)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 어느 날이냐 곧 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  


어려운 시다. 심어진 나무를 두고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있다. 화자의 정서를 알 수 있는 부분에 줄을 그어 보았다. 어둠이 이파리를 길어 올리고 목책 속에 갇힌 먼 과거, 담겨진 흙에서 자라기는 하지만 다시 어린 나무로 돌아갈 수는 없으며,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떻게 살고있는지 화자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다. 나무에 바람에 불고 햇살이 비치듯 어느 때는 고통이고 어느 때는  그것마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젊은 꽃같은 날은 잠시, 이제 이파리만 날리는 나무가 되었다.

나무들은 지나간 추억처럼 서있고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간다고 했다. 그런데도 앞으로의 자신의 삶에게 자신에게 타오르는 불처럼 솟아오를 거냐고 묻는다. 지금도 그는 그의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을 껴안고 있는 것이다.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작가 : 기형도(奇亨度, 1960~1989)

운율 : 내재율

성격 : 고백적, 자기 성찰적

제재 : 식목(植木)

주제 : 전망이 부재하는 삶에 대한 성찰

출전 : [입 속의 검은 잎](1989)  



   이 시는 나무를 심은 이후에 시인의 머릿속을 지나간 많은 상념들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의 과거, 현재, 미래의 삶은 식목제 때 심어진 나무 한 그루와 같이 이해될 수 있다. 흙 속의 뿌리는 현재와 미래의 삶의 기반이 되는 '과거의 삶, 경험, 기억'을 의미한다. 따라서 현재의 삶의 공간은 이파리로 자라나고 있는 모습이며, 미래는 뻗어나가는 줄기로 형상화되고 있다. 이 시에서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공간이 나무의 성장이라는 수직적인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다.

   어느 날 시적 화자가 자신의 과거의 삶을 뒤돌아보니 그것은 땅 속에 묻힌 나무의 뿌리처럼 아득하기만 하고 손에 쉽사리 잡히지 않는다고 하며, 이처럼 과거로 돌아가기 어렵기에 현재의 삶을 살아갈 뿐이라고 한다. 특정한 목표나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무상함을 느끼며 주어진 삶을 살아갈 뿐이다. 화자는 살아가면서 늘 과거와 마주하게 되는데, 먼 과거일수록 유쾌하지 않았던 기억과 마주치게 된다.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시인은 과거와 미래를 응시하며 삶에 대한 자기 성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출처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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