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소개
고은(高銀1933- ) 전북 군산 출생. 본명은 고은태(高銀泰). 1952년부터 1962년까지 승려 생활 법명은 일초(一超). 민족문학작가회의 의장 역임. 1958년 “현대시” 추천으로 등단. {피안감성(彼岸感性)}(1960), {해변(海邊)의 운문집(韻文集)}(1963), {신 언어의 마을}(1967), {새노야}(1970),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1974), {부활}(1975), {제주도}(1976), {입산}(1977), {새벽길}(1978), {고은 시선집}(1983), {조국의 별}(1984), {지상의 너와 나}(1985), {시여 날아가라}(1987), {가야 할 사람}(1987), {전원시편}(1987), {너와 나의 황토}(1987), {백두산}(1987), {네 눈동자}(1988), {대륙}(1988), {잎은 피어 청산이 되네}(1988), {그 날의 대행진}(1988), {만인보}(1989), {독도}(1995) 등의 수많은 시집을 간행했다. 또한 초기의 허무주의 시편에서부터 후기의 역사 의식과 결부된 전투적 시편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시적 편력을 거친 시인이기도 하다. 아울러 소설집으로는 {피안앵(彼岸櫻)}(1962), {어린 나그네}(1974), {일식(日食)}(1974), {밤 주막}(1977), {산산히 부서진 이름}(1977), {떠도는 사람}(1978), {산 넘어 산 넘어 벅찬 아픔이거라}(1980), {어떤 소년}(1984), {화엄경}(1991) 등이 있다.
작품의 전문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 1연: 방황의 끝)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 2연: 눈 덮인 풍경의 고요함과 평화)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의 고백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 3연: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1960) (▶ 4연: 무욕(無慾)의 상태)
어구 풀이
▶온 겨울을 떠돌고 와 : 오랜동안 떠돈 비정한 현실 세계
▶눈 내리는 풍경 : 정화의 이미지. 관용과 포용의 이미지
▶묵념의 가장자리 : 위대한 적막(고요함. 적막함) → 간절한 염원과 소망이 깔려 있다.
▶대지의 고백 : 그 동안의 방황과 번민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 비워 놓은 내 의식 세계로 자연스럽게 들려 옴. 새로운 정신 세계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 눈을 보면서 집착을 버리고 정화된 나는 드디어 세계를 새로 인식할 수 있게 됨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 현실의 방황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내면의 갈등과 고뇌가 사라져 버린 상태 → 세상의 어떠한 빛도 아직 침범하지 못한 원시의 어둠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 삶의 괴로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 : 염원과 소망이 깔려 있는 적막의 상태
▶쌓이는 눈더미 앞에 : 고통과 쾌락, 야망과 좌절, 사랑과 미움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 번민과 방황에서 벗어난 상태(무념 무상의 경지 - 위대한 적막)
특히 ‘~노라’의 종결형은 ①엄숙하고 묵직한 어조, ②감격스러 운 감정을 표현하고 있음, ③명상적 분위기를 뒷받침해준다.
작품 감상
눈은 그 흰 빛깔로 인해 정화(淨化)의 이미지를, 모든 것을 다 감싸안는다는 의미에서 관용 또는 포용의 이미지를 가진다. 이 작품의 눈 역시 이러한 이미지를 보여 준다.
이 시에서 눈길은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즉 지난 날의 고통과 고뇌를 정화시켜 포근히 감싸안는 평온한 상태의 표현이다. 그러한 상태는 시인이 ‘온 겨울을 떠돌고’에서 같은 오랜 방황과 번민의 구도(求道) 생활 끝에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벅찬 감격으로 받아들이게 된 경지이다. 이 경지를 작자는 ‘설레이는 평화’라고 표현했다. 그러한 경지에서 그는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 보이고 ‘대지의 고백’이 들리는 듯한 새로운 적신 세계가 열리는 것을 체험한다.
이렇게 그 동안의 번민과 방황에서 벗어난 명상의 정신 상태를 작자는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라는 구절에 압축했다. 여기서의 ‘어둠’은 절망적인 암흑이 아니라 모든 욕심, 후회, 애증(愛憎) 따위를 지워 버린 무념 무상(無念無想)의 경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곧 ‘위대한 적막(寂寞)’과 같은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