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의 마을에 가서
- 고은(문의 마을에 가서, 1974)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는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 문의 마을 : 충북 청원군 대청 호반(湖畔)의 마을
핵심정리
▶ 성격 : 명상적, 주지적, 관념적, 철학적
▶ 어조 : 담담하게 절제된 어조
▶ 구성 : ① 죽음과 삶의 길이 어떻게 다른가(1연) ② 죽음과 삶의 길이 하나임(2연)
▶ 제재 : 장례 의식
▶ 주제 : 죽음과 삶의 상거(相距)와 합일(合一)
(죽음을 통하여 깨달은 삶의 경건성)
작품의 감상
이 시의 배경에는 불교적 세계관(世界觀)이 깔려 있다. 고은 자신이 승려였던 점도 그러하지만 사물(事物)과 현상(現象)을 보는 화자의 태도에서도 그런 면은 드러난다.
불교는 분별지를 거부한다. 모든 사상은 서로 연속적이며, 단절돼 있지 않다고 본다. 이분법적 사고로는 세계의 진체(眞體)를 뚫어 볼 수 없다는 것이며, 하나의 관점에서 사상을 보는 편견을 물리친다. 그리하여 공사상(空思想)의 요체인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곧 형상은 텅 빔이며, 텅 빔은 곧 형상이라는 역설적 구조로 대상을 파악한다. 흔히 다르게 보이는 것도 실상은 연속적이라는 깨달음을 요구한다.
죽음은 삶과 모순 관계에 있다. 살아 있지 않은 상태가 죽음이요, 죽으면 이미 살아 있지 않다는 판단이 세속적 지식이다. 그러나 이분법적 사고를 지양하면, 죽음과 삶은 연속적이다. 삶의 어느 곳에 죽음이 닿아 있고, 죽음은 언제나 삶을 전제한다. 그것은 '생사(生死)'라는 하나의 흐름 위에 존재하는 어느 한 지점일 뿐, 삶과 죽음이 독자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삶의 전면적 부정이 죽음이 아니며, 죽음은 정태적(靜態的) 개념이 아니라 삶처럼 하나의 과정이며, 동태적(動態的) 개념이다. 그것은 길처럼 흐른다. 길은 끊어진 듯하지만 이어져 있다. 삶과 죽음이 언제나 맞닿아 있듯이 따라서 이 시에서의 '길'도 동태적 범주에 속한다. 죽음을 향해 가는 삶의 도정(道程)이라고 보는 게 옳다. 길은 삶이자 죽음이다. 길은 걸어가는 자들의 세계이다. 이렇게만 보면 길은 '삶'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 길이 어디로 향하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그렇게 보는 것이 매양 옳은 것이 아님이 드러난다. 우리의 삶은 이렇게 죽음이라는 세계로 뻗어 있는 것이다.
화자가 문의 마을에서 본 것은, '가까스로 이어진 길'이다. 그것은 큰길이 끝날 듯하면서도 작은 길들과 이어진 모습이다. 화자는 세계의 연속적 성격을 비로소 발견한 것이다. 죽음은 무화(無化)의 상태이다. 길이 끝나면 죽음이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 허적(虛寂)의 상태이다. 길은 '추운 쪽' 즉 죽음의 세계로만 향한다. 모두가 죽음으로 향하는 건 자연의 섭리이다. 그것은 냉혹하기 짝이 없는 진리이다. '마른 소리' '귀를 닫고'는 죽음의 엄숙성, 냉혹성, 비정함을 비유한 말이다. 그러나 삶은 이 엄연한 길을 말없이 가는 하나의 과정이지만, 그 길에서 잠시 멈추거나 거꾸로 돌아서기도 하면서 잠시 삶을 지연시키기도 한다. 그것이 삶의 현장 '마을'이다. 그러나 그 '마을'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 곧 길과 길이 가까스로 이어지는 지점에 있을 뿐이다. 마을이 '길 위'를 벗어나 있지만, 길과 무관하지는 않다. 마을도 길과 같이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그것은 '눈'에 의해 포괄된다. 눈은 삶과 죽음을 포괄하는 운명의 상징이 되는 셈이다. 자연의 섭리라 해도 좋은 이 숙명은 삶과 죽음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 눈이 마을을 덮고 길을 덮고, 그리하여 세계 모두를 하나로 팔짱 끼게 한다. 그것은 '마을'과 '산'이 가까이 하나로 닿게 한다. 화자는 이 운명의 엄숙성을 잔잔히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슬프거나 허무한 인식은 아니다. 죽음이 삶을 고스란히 껴안는다는 표현에서 보듯이, 그것은 하나의 경건한 의식(儀式)이다. 죽음이 삶을 받지 않으려 하지만 결국 삶의 소리를 듣고는 저만치에서 다시 돌아보고 받아들이고 만다. 삶을 포용하는 것이다. 그 순간 삶은 죽음과 하나가 된다. 죽음은 돌을 던지는 행위로 물리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숙명이다. 죽음과 삶이 하나임도 엄연한 진리이다. 눈 내린 문의 마을의 정경에서 화자는 세계의 참다운 진리를 보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하나임을. <송승환, 한국현대시 분석과 이해>
이 시는 1,2연이 모두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로 시작되고 있다. 즉 문의 마을에 가서 시인이 느낀 서정을 병렬식으로 진술 '나는 그것들을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로 귀결시키고 있다. 1연은 죽음과 삶을 동일시하는 철학적 통찰이 제시되고 있다. 시인은 '문의 마을'에 가서 2행 ~ 4행의 상황을 체득한다. 그것은 삶과 죽음이 뒤얽혀 있는 사람들의 길이다. 결국 삶과 죽음은 엄연한 단절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긴밀하게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 사람이 사는 것이라는 것은 '저마다 추운' 죽음의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삶에는 결코 부인하지 못할 또 다른 삶의 세계가 있다. 엄연히 죽음과 다른 세계가 있다. 죽음을 향한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서 '재를 날리며' 죽은 자를 조상하고, 애도하며 죽은 자를 앞질러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문득 팔짱을 끼고' 생각해 보니, '먼 산'이, 즉 죽음이 '너무 가깝게' 얽혀 있음을 다시 깨닫게 된다. 2연의 시적 상황은 역시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죽음과 삶이 단절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죽음을 받는 것을' 거부하고, 인기척을 듣고는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보는' 행위의 주체로 존재한다. 즉 삶과 죽음이 '저만큼'의 거리로 존재한다. 그 거리를 두고 죽음이 삶을 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과 삶은 서로 모순된 것이면서도 하나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시에서도 노래하고 있는 것은, 죽음의 상황 속에서 감지되는 삶의 경건성이다. 죽음을 늘 '저만큼'의 거리에 두고 있는 삶. 그 삶의 경건하고 아름다운 예찬이 이 시의 주제이다.
●고은의 <문의 마을에 가서>와 천상병의 <귀천> 비교
고은<문의마을에 가서> | | 천상병의 <귀천> |
명상적, 주지적, 관념적, 철학적 | 성격 | 시각적, 서술적 |
담담하게 절제된 어조 | 어조 | 내면적, 독백적 어조 |
죽음을 통하여 깨달은 삶의 경건성 | 주제 | 생의 긍정과 죽음의 초월 |